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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오래된 부재


2019/08/14 원자경K4[lev.6]






"원자경K4"님에게 편지쓰기

"이제부터 시와 음악과 영화와 자연 속에서 살고픈 사람.
지금까지 책과 학생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
그 삶이 있었기에 누가 물어도 어떤 상황이어도
'난 행복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

스무살 때부터 강화를 좋아했고
삶에 지칠 때마다 강화에서 힘을 얻었기에
늙으면 강화에 들어와 살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를 2년 전에 실현한 행복한 사람.

강화에 들어와 가끔 동검도 작은 극장에서
풍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더욱 더 행복한 사람.

"

  


                                                                1.

  그는 매일 아침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무릎 위에 나무 상자를 올려놓는다. 늘 소중하게 목에 걸고 다니는 열쇠로 상자를 열고 정교하게 오려놓은 멋진 사진을 꺼내 천천히 음미한다. 그리고 오늘의 잡지에서 새로운 사진을 꿈꾸는 기분으로 오려 넣는다. 그리고 나무 상자의 열쇠를 다시 잠근다.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기억을 오려낸다. 자신의 과거의 모습일수도 있는 멋진 남자의 모습들과 성(城)과 같은 집과 화려한 생활을. 또 그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고 뺴앗아 가버린 독일군의 이미지들을. 때론 그녀가 매료되었던 그의 눈빛을 닮은 사진 속 남자의 뇌살적인 눈빛에 잠시 잠기기도 한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여자의 질문에, 그래야 하루가 행복하다고 답한다. 어떤 기준으로 사진을 오리고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 함께 하게 알려달라고 그녀는 묻는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리는 사진들이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묻고, 남자는 “다 연결돼요!” 그뿐이다.


  그는 매일매일 조심스럽게 자신의 과거 속에 흐트러져 있는 기억의 파편들, 또렷한 서사로 연결되어 구술할 수는 없지만, 조각조각의 이미지를 오려낸다. 그는 과거를 애써 기억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남아있는 기억을 아주 정교하게 오려서 따로 보관한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삶, 넝마를 주어 생활하고 강변의 움집에서 노숙하는 자신의 모습에 안주하고 평화로울 수 있다. 애써 과거를 찾으려 상실된 기억을 짜 맞추려하지 않는다. 어느날 무심결에 목에 건 열쇠로 기억의 문을 열고 들어가, 그동안 오려낸 기억들이 한 편의 서사로 엮어지기를 기대하는지는 모른다. 그는 강물이 흐르듯, 그냥 매일 세빌리아 이발사의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그를 이끄는 추억의 거리와 그녀 곁을 맴돌며, 현실의 삶을 따라 매일 걸을 뿐이다. 그에게 삶은 “일어나, 앞으로 나가!”이다. 그에게 삶은 현재 뿐이다. 그에게 과거는, 아직도 제복의 남자만 보아도 게슈타포포에게 쫒기고 나찌의 고문이 살아나는 무서운 공포이다. 과거 전쟁의 트라우마가 과거 그가 멋진 청년으로서 행복하게 살았던 삶에 다가가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그래서 그 기억들을 소중하게 오려서 사라지지 않도록 나무상자에 숨긴다. 그에게 과거는 열어서는 안되는 ‘판도라의 상자’이다. 그에게는 과거의 부재가 오히려 행복한 삶일지도 모른다.

                                                                       2.

  테레사, 그녀는 아직도 과거 속에서 산다. 현재 자신을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가 곁에 있어도 늘 과거 남편과 함께 했던 쇼를루 서 로리의 추억에 잠기고 실종된 남편을 잊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날 자신이 경영하는 카페 앞을 세빌리아 이발사의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지나가는 떠돌이 부랑아를 보고 가슴이 철렁한다. 자신에게 남편이 불러주었던 아리아, 16년 전 실종된 남편을 생각하며 하루종일 그 남자의 뒤를 따라 다니다 그 남자의 움집 밖에서 밤을 샌다. 거의 자신의 남편일 거라고 단정짓고, 남자에게 접근하여 잃어버린 16년 세월을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가 카페 앞을 지나갈 시간이면 오페라 음반을 크게 틀어 그를 키페 안으로 들아와 맥주를 마시게 하고 저녁 식사에까지 초대한다. 남편이 좋아했던 음식과 치이즈를 대접하며 단 한 가닥의 기억이라도 확인하려 애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남자는 과거에 대한 아무런 기억이 없다. 오로지 남은 기억 하나, 들판에 혼자 남아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 남자에게는 혼자 버려진 황량한 그 들판의 둥그런 습지가 여자에게는 결혼 전 남편과 사랑을 나누던 곳이다. 이렇게 16년이란 세월은 서로가 사랑했었다는 사실조차 확인할 길 없는 “그토록 오래된 부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부재할수록 부재를 단호하게 부정한다. 그래도 단 하나의 소통으로 남아있는, “음악이나 듣지요.” 로시니의 세빌리아 이발사가 흐르고, 둘은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가까워진다. 그녀는 문득 떠 하나의 기대로, “혹시 당신 춤을 추는 것 기억해요?”


  조르쥬 들뤼르 작곡에 감독 앙리 콜피가 가사를 붙인, ‘세 개의 작은 음표 trois petites notes de musique’라는 샹숑. Cora Vaucaire의 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부재했던 사랑, 잊혀진 사랑에 대한 테레즈의 슬픈 감회처럼 휘어감고 돌면서, 둘은 잠시 행복한 춤을 춘다. 춤을 추다가 그녀는 거울에 비친 그의 머리에 있는 흉터를 보게 된다, 감옥에서 도망치다 머리에 총알을 맞고 실종되었다는 남편을 떠올리며, 그가 알베르라고 확신한다. 그 순간 테레즈는 생각나는 여자가 없냐, 결혼은 했냐 약혼한 기억은 없냐 등 계속 과거를 묻지만, 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정신적 기억은 사라졌지만 몸은 기억한다고. 그래도 둘은 예전처럼 멋지게 화합을 맞추어 춤을 마쳤다. 그녀는 남자에게 “봐요 잘 추잖아요?( 기억도 찾으려 애쓰면 기억할 수 있잖아요?)라고 다그치고, 남자는 ”당신이 친절해서 그래요.“ 자신의 기억과 무관하게 당신의 친절 덕분이라고 화답한다. 남자가 되돌아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나간다고 한다면, 그녀는 여전히 뒤를 보며 불확실한 미래보다 확실한 과거로 회귀하기를 바란다. 그곳에 분명 ‘우리’의 사랑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사랑은 소유하는 게 아니다. 소유하려 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내가 간절히 원해도 내 주머니 안에 넣을 수 없다. 사랑은 사랑할 수 있음 그 자체로 만족해야 한다. 설혹 그가 내 곁에 없어도 사랑할 수 있기에 삶이 충만할 수 있고, 부재의 사랑이어도 그리워할 수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면서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소유하려고 하고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사랑은 구속이고 치졸한 싸움이 된다. 테레사는 자신의 기다림만이 더 절박했고,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이 사라지고 없음에 분노하고 조급하다. 그녀에게 사랑은 과거 알베르와 나누었던 사랑에 머물러 있고, 알베르가 나를 사랑했던 남자이어야 했다. 상대는 이미 나에게 줄 수 없는 상황인데 계속 내놓으라고 보여달라고 확인해달라고 채근한다. 그녀에게 알베르는 지금 눈 앞에 있는 존재로서의 한 사람이 아니라, 내 기억 속에 착색된 알베르이어야 한다.


  자신이 이 남자에게서 알베르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사람이라고 확인한다면, 그리고 그 앞에서 아직도 가슴이 뛰고 길 위에서 노숙하는 더러운 행색의 남자이어도 기꺼이 안겨서 행복한 츰울 출 수 있다면, 그리고 그와 함께 공유하는 음악의 세계 속에서 충분히 행복하다면, 그의 과거가 왜 그리 중요한가? 과거의 알베르가 아니면 또 어떤가? 그가 과거를 기억하든 실재 알베르가 아니든 충분히 지금부터 사랑하면 된다. 춤을 추면서 계속 테레즈라는 여인을 아냐고 약혼한 기억을 결혼한 사실을 묻다가 그 남자의 머리에 있는 상처를 보고 씁쓸해 하는 그 표정은 바로 그런 그녀의 속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흔히 진심으로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에게 머리가 반으로 잘린 상처를 확인한 순간, 껴안고 통곡할 일이다. 이런 큰 상처였는데 살아있음만도 다행이고 그 고통이 자신의 고통으로 절규가 나올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 실망하는 표정은, 그 순간 남자에게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기억을 확인하는 질문은, 남자의 기억 속에서 자신이 사라진 사실이 더 안타까웠던 것이다.


  알베르는 과거를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사람이다. 자신이 어디서 온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가 가장 답답할 일이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기억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만큼 그에게 과거는 죽음의 공포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뇌 손상으로 기억이 사라진 것도 있겠지만, 일부 남은 기억도 제복을 입은 사람만 보아도 피할 만큼 그의 무의식은 공포로 싸여 있다. 그런데 끝까지 너는 알베르야! (그것도 몰라. 이 바보야!)하는 심정으로 어둔 골목 길에서 큰 목소리로 ‘잔인하게’ 알베르를 불러대는 테레즈와 그의 지인들! 결국 불쌍한 알베르는 머리에 총을 맞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항복의 자세로 도망가다가 버스에 치인다. 테레즈는 그를 또 한 번 죽인 것이다. 테레즈에게는 16 년간 기다려온 사랑에 대한 보상, 과거의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달콤함, 알베르 자체보다는 알베르로 인해 자신이 누렸던 사랑이 더 중요했기에, 16 년만에 다시 자신에게로 온 사랑을 놓쳐버린 것이다. 자신 안에 있는 사랑보다도 눈 앞에 있는 사랑, 자신의 고통보다도 알베르가 겪었던  고통과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죽음의 공포를 더 아프게 생각했다면, 비극적 결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알베르는 서서히 그녀의 손을 잡고 현실의 문턱을 넘어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알베르는 16 년만에 어렵게 만난 따뜻한 저녁식사와 아름다운 음악과 춤의 시간을 테레즈의 조급함 때문에 다시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늘 과거와 미래 때문에 ‘현재’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 얽매여 있거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중요한 순간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다. 사랑은 확인하려 하면 할수록 소유하려하면 할수록 멀리 비껴가버린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동검도 골목이 아무리 보고 싶어도 다시는 볼 수 없는 작년에 돌아가신 친정엄마 생각으로 자꾸만 흐릿해졌다.













 유감독



2019/08/14
플롯의 개요를 남자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참 드문 일인데
아주 새로운 시각이군요...

'사랑은 소유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라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영화였죠.

여주인공 Alida Valli의 우수 가득한 표정이 인상적이었죠.
그녀의 또 다른 작품 <격정>을 감상하러 오세요
 




 유감독



2019/08/14
참, 그리고 이 리뷰와 함께 6등급 회원이 되셨습니다.  




 원자경K4


2019/08/14
고맙습니다.
오 년 만에 6등급 .별 거 아닌데 기분은 좋네요.
어제 마들렌도. 연이어 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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