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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시작 : 2022-08-22 (월) 
선택시간 : 15:00 -17:00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각본 

Aldo Fabrizi...Don Pietro Pellegrini
Anna Magnani...Pina
Marcello Pagliero...Luigi Ferrari, alias Giorgio Manfredi
Vito Annichiarico...Marcello, Pina's Son
Nando Bruno...Agostino, the Sexton

4:3 full screen/color/2.0 디지틀 모노/105분
"1946' Cannes Film Festival 황금종려상
1947' Academy Awards, USA 각본상 후보
1946' Italian National Syndicate of Film Journalists 최우수작품상, 여우주연상
1946' National Board of Review, USA 올 해의 탑 텐 영화,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여우주연상
1946' New York Film Critics Circle Awards 최우수외국어 영화상"

언어/이탈리아
자막/한국
번역/DRFA,김교수





"잉그리드 버그만이 자신의 영혼이 빼앗겼다고 고백했던 그 영화를 만나봅시다!"





(스트롬볼리에 있는 로셀리니 기념관)





(그곳에는 잉그리브 버그만이 로셀리니에게 보내었던 편지가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시대를 흔들었던 위대한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빠져들어갈 때는

그 어떤 연유로 빠져들게 되는 것일까요?

1948년 뉴욕의 맨해튼.

잉그리드 버그만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파이잔>을 보기 위해 텅 빈 극장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이미 2년 전 로셀리니의 네오리얼리즘의 걸작 <무방비 도시>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로셀리니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다 찾아보았죠.

<무방비 도시>의 단순하고도 강렬한 리얼리즘 색채에 매료된 버그만은

<파이잔>을 본 후, 로셀리니에게 편지를 썼죠.


“만약 당신이 영어를 매우 잘하는,

이탈리아어는 그저 ‘사랑해 ti amo’ 밖에 모르는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든 그곳으로 가서 당신과 영화를 찍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로셀리니는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버그만의 명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버그만은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펠바운드>와 <오명>, 레오 맥커리의 <성 메리의 종>,

빅터 플레밍의 <잔다르크> 등에 출연하며 할리우드 여신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때죠. 

동료들은 로셀리니에게 버그만의 명성에 대해 넌지시 일러주었지만

그는 할리우드 대스타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로셀리니는 버그만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의지를 영화에 대한

재정적 투자의 의미로 받아들였죠.

결국 버그만이 로셀리니의 신작에 출연하기로 하자

전설적인 미디어 재벌인 하워드 휴즈가 제작자로 나섰습니다.

휴즈는 에바 가드너를 비롯한 여러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버그만에게도 반한 상태였죠.

이 위험한 사랑은 처음부터 폭탄을 안고 시작되었죠.

특히 버그만이 빼앗은 로셀리니는 유럽 영화계의 대선배 Anna Magnani 이죠.

자신 역시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서 버그만은

왜 그다지도 무모한 사랑을 시작하였을까요?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버그만은 함께 한 첫 영화 <스트롬볼리>를 촬영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아이를 가졌다)




두 사람이 함께한 첫 영화 <스트롬볼리>를 촬영하는 동안

두 사람은 이미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엄격한 청교도적 윤리가 팽배했던 미국에서는 맹비난이 쏟아졌죠.

국회의원과 종교 지도자, 시민 단체를 비롯한

전 미국 사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스트롬볼리>는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둬드립니다.

<스트롬볼리>의 비관습적이고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는

버그만 팬들의 기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결국 버그만이 그토록 헐리우드 영화에서 찾지 못했던

여배우로서의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데는

결정적인 필모가 되고 맙니다.

로셀리니는 자신의 아내이자 영감의 원천인 버그만을 데리고

<유로파 51>, <이탈리아 여행>, <공포> 등의 영화를 차례로 완성해갔지만

수많은 영화 동지들로부터 네오 리얼리즘을 차디차게 배반한

배반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잇따른 상업적 실패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은 버그만을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버그만은 로셀리니를 떠나

1956년 장 르누아르의 <엘레나와 남자들>을 찍은 후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갑니다.

로셀리니의 예술적 단물을 제대로 흡수한 버그만은

헐리우드 복귀작 <추상>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서운 성숙의 연기를 보여줌으로서 단번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꿰어 찹니다.  








한편, 버그만과 헤어진 후 훌쩍 인도로 여행을 떠났던 로셀리니는

이후 험난한 영화인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무도 자신의 영화에 투자를 해주질 않자

"다시 처음부터" 라는 결단을 내어걸고

이상하리 만큼 자신보다 앞서간 시대의 명인들을 소박하게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탄생한 영화들이 바로 <파스칼>과 <소크라테스>, <갈릴레오> 등의

걸작 들입니다.

대륙을 횡단한 이 세기의 연인들은 이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잊지 않았습니다.

버그만은 노년에 잉마르 베르히만의 <가을 소나타>에 출연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무방비 도시>를 본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졌다.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결코 난 헐리우드의 그저 그런 여배우로 머물었을 것이다.

로셀리니는 내 일과 인생,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





(Anna Maria Magnani (Italian pronunciation: [ˈanna maɲˈɲaːni]; 7 March 1908 – 26 September 1973)




조나단 유가 전 세계에서 연기 잘 하는 여배우 탑 텐에 포함시킵니다.

비록 지나 롤로브리지다나 소피아 로렌 같은 외모는 타고나지 못했지만

대신 그녀는 한 번 잡은 시나리오를 씹어 먹듯이 자신의 것으로 체득화 시키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장미 문신의 추억>에서는 미국으로 이민 온 억척스러운 다문화 어머니를 연기해

그녀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원작자 테네시 윌리엄스조차 그녀의 연기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이 영화로 외국 배우로서 당당히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죠.

전반적으로 그녀는 전후 이탈리아에서 고생하며 살아가는

억척스러운 어머니상을 그려내는데 전문가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난 마냐니는 로마 빈민가에서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났죠.

이후 청소년 시기를 로마에 있는 프랑스 수녀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와 피아노 연주를 배웠습니다.

이 학교에서 그녀는 크리스마스 연극 무대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연기에 대한 열정을 키웁니다.

이후 그녀는 로마의 국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연기 수업을 받기 위해 나이트 클럽에서

노래를 하며 학비를 벌었습니다.

이때 그녀의 별명은 '이탈리아의 에디뜨 피아프',

<스캄폴로,1928>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에 데뷔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 DRFA에서도 개봉했던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의 <테레사>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두각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녀를 세계적인 대배우로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바로 로베르트 로셀리니와의 만남입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점령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만든 전위적인 네오리얼리즘 영화,

<무방비도시>에서 마치 저것이 다큐인지 영화인지 구분이 안가는 혁신적인 로셀리니의 연출 기법 때문에

안나 마냐니의 연기는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주목 받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완전한 연기자로 각인 시킨 것은

장 콕토의 희곡을 펠리니가 각색한,

오로지 혼자서 33분간 집중적으로 수화기 너머 떠나가는 남자 앞에서

모든 희노애락을 다 토해내는

로셀리니의 <사랑>이죠.


1973년 9월 26일 로마에서 65세의 나이로 췌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녀는 살아생전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함께 묻힐 계획으로 두 사람의 묘지를 사놓았죠.

한동안 이곳에 안치되었으나, 그 후 남부 라치오주

산 펠리체 치르체오에 있는 치미테로 코무날레에 영구 매장되었습니다.






(무방비도시 촬영 현장에서 로셀리니와 안나 마냐니의 행복했던 한 때)




로셀리니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무방비 도시>는

나치 치하의 이태리 지하 저항 활동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독일군에게 살해된 한 신부의 실화를 근거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영화를 시종 이끄는 인물은 레지스탕스 요원 맨프레디를 중심으로

그가 피신하는 행로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다큐 형식으로 포착합니다.

내용보다는, 이른바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의 효시를 이룬

혁신적인 영상을 선보인 기념비적인 작품입니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독일 점령 하에 있던 로마의 민중들은

팍팍한 삶을 영위하며 나찌에 대항하는 지하 운동을 펼칩니다.

민족 해방 위원회의 지도자인 만프레디는 게수타포에 쫓기다

간신히 친구 프란체스코의 아파트로 숨어들죠.

이를 눈치챈 나찌는 아파트를 급습해 프란체스코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을 체포합니다.

다행히 위기를 피한 만프레디는 프란체스코를 비롯한 레지스탕스를 구출해 냅니다.


연합군이 다가오고 이미 외곽 지역에 폭탄이 투하되기 시작하던 순간을 배경으로

미국 군대가 로마를 해방시키기 바로 전 로마를 점령하고 있던

나치와 싸우고 있는 카톨릭 공산주의자의 제휴 활동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유격병의 활동, 독일과 이탈리아 경찰의 습격과 보복전,

강탈, 협력자와 저항자들, 생활을 영위하길 원했던

대다수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긴장들,

전쟁의 살육과 비참한 모습들을 서로 엇갈리게 연대적으로 기록해나간 희대의 걸작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고,

열린 결말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네오리얼리즘의 효시 같은 영화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잉그리드 버그만이 영혼을 빼앗겼다는 <무방비 도시>를

뜨거운 동검도의 8월 태양 아래서 만나보겠습니다.



[DRFA,JONATHAN]

엮인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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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츠카T35

2022.07.14 11:30:55

<무방비 도시> 예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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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실장

2022.07.14 12: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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