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03-26 (일) |
"극장 출발 전 상영 시간과 영화 제목 최종 확인해주세요! 극장 사정상 예고없이 30분에서 최장 1시간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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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틸,Eric Till 연출
Ulrich Tukur ... Dietrich Bonhoeffer
Johanna Klante ... Maria Von Wedemeyer
Robert Joy ... Manfred Roeder
R.H. Thomson ... Knobloch
4:3 full screen/color/2.0 돌비 디지틀/180분(DRFA Re-Edit)
"2001' Gemini Awards 남우주연상 후보
2000' Monte-Carlo TV Festival 그랑프리
2000' Munich Film Festival 그랑프리"
언어/영국
자막/한국
번역감수/DRFA,조한우
"너희 중 믿음이 있다 하고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 야보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랐던 본 회퍼 신부의 일대기"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있지만
마치 영주가 자기의 성에서 나오듯
태연하고 명랑하고 확고하게 걸어 나온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가 간수들과 대화할 때
자유롭고 다정하고 맑게
마치 명령하는 사람은 그들 아닌 나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람들은 내가 침착하게 미소 지으며 자랑스럽게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불행한 나날들을 지내고 있다고 말을 한다.
나는 정말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자일까?
그렇지 않으면 다만 나 자신만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 속의 새처럼 불안하게, 그리워하다 병이 들고
목을 졸린 사람처럼 숨 쉬려고 몸부림 치고
색깔과 꽃과 새들의 노랫소리와
친절한 말과 이웃들을 그리워하며
폭행과 사소한 모독으로 인해 분노로 떨며
큰 사건에 대한 기대에 사로잡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친구를 그리워하다 낙심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창작하는 데 지쳐서 허탈에 빠지고
의기소침하여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나는 도대체 누구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오늘은 이런 인간이고 내일은 다른 인간일까?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들이 나를 비웃는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위의 시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가 쓴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입니다.
바르트와 틸리히보다 한 세대 뒤에 활동한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또한 나치 독일에 의해 죽은 20세기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아버지 칼 본회퍼와 어머니 파울라 사이의 8남매 중 여섯째 쌍둥이로 태어났죠.
본회퍼가 열네 살 때 목사가 되겠다고 밝혔을 때
가족들은 모두 놀랐고 반대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교회는 헌신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고
시시한 부르주아적 제도라고 하면서
그에게 학자나 음악가가 되라고 권유했죠.
하지만 본회퍼는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개혁하겠다"면서 굳은 의지를 보였고,
그의 단호한 모습에 가족들은 곧 그 결정을 존중하였습니다.
본 회퍼는 열일곱 살 되던 때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고,
다음 해에 베를린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당시 교수들은 한결같이 이 젊은 신학도의 학문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으며,
특히 노 신학자 하르낙은 그를 "천재적 신학 청년"이라며 절찬했다고 합니다.
본 회퍼는 스물한 살 되던 1927년,
베를린 대학 신학부 박사학위 논문으로 「성도의 교제 sanctorum communio」를 제출하였는데,
이것은 대단히 우수한 논문이어서
칼 바르트는 이를 "하나의 신학적 기적"이라고까지 칭찬하였습니다.
본 회퍼는 졸업 후 잠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약 일 년 동안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하였죠.
그 뒤 영국 런던의 독일인 피난민들로 구성된 교회에서 약 이 년간 목회를 합니다.
그는 1936년에 독일로 돌아와 고백 교회가 운영하는
핑켈발데 신학교 운영의 책임을 맡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는 목회자 후보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을 훈련시켰고,
또한 1936년 히틀러에 의해 금지될 때까지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합니다.
히틀러는 제1차세계대전에 패한 독일의 무너진 경제와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시켰고,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면서 순식간에 스타로 등극합니다.
이 당시 히틀러의 인기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대단하였으니,
소위 '독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운동'은 히틀러를 무너진 독일을 세우고
온 세계에 번영을 가져다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이 시대의 구세주라고 선전했습니다.
하지만 본 회퍼는 히틀러의 운동에 들어 있는 우상 숭배적이며,
반기독교적인 정신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히틀러가 총통이 된 다음 날 아침 베를린 방송을 통해
'젊은 세대에 있어서 지도자 개념의 변화'라는 강의를 했습니다.
이 강의의 핵심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직책을 세우셨고,
이 직책에 적절한 사람을 뽑아서 일하신다.
그런데 직책에 관계없이 어떤 사람에게 전권을 주게 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요
결국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너무나 예리하고 깨어있지 않으면 꿰뚫어 볼 수 없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방송은 도중에 중단되었고,
이 때부터 본 회퍼는 게슈타포(Gestapo)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교회와 유대인 문제」라는 논문에서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당시 유대인들을 쫒아내던 독일 교회를 비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어떤 특정 인종이나 사람이 교회에 올 수 없을 때,
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거부하는 것이요
기독교의 존립 정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을 쫓아내는 그리스도인들은
감히 그레고리안 찬송가를 부를 수 없다"라고 외쳤습니다.
1937년 나치는 본 회퍼의 주 활동 무대인 핑켈발데 신학교를 폐쇄하고 교장이던 본회퍼를 추방합니다.
이 때부터 본 회퍼는 죽을 때까지 일정한 주소를 갖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들을 동원하여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히틀러의 진상을 알리고,
또 독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런 활동 중에 그는 미국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미국에 있던 그의 친구 폴 레만은 본회퍼의 미국에서의 일정을 다 잡아 놓고,
전쟁이 끝나고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미국에 머물러서 강의와 연구를 할 것을 부탁하죠.
그러나 본회퍼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의 심정을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유니언 신학교의 학장인 코핀 박사의 집 정원에 앉아서
나의 상황과 민족의 상황을 생각하고 기도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해졌다.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우리 민족이 수난당하고 있는 이때
나는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
만일 이 때에 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본 회퍼는 다시 독일로 돌아왔고
그리고 본격적으로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는 지하 운동에 깊이 가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운동에서 본 회퍼는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새벽 교수형을 받게 됩니다.
본 회퍼는 부드러운 봄의 숲 속의 교수대 아래서 벌거벗겨진 채
꿇어앉아 마지막 기도를 드립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9세였죠,
본회퍼가 죽은 지 3주 후에 히틀러는 자살했고,
한 달 뒤에 독일 제3제국은 무너졌으며 히틀러의 희생자들은 자유를 얻게 됩니다.
본 회퍼의 삶을 가장 극적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꼭 챙겨 보세요.
[DRFA,JONATHAN]

3월26일 일요일
오후4시 본회퍼 4인 신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