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배우는 세계사

예카리나 여제,..aka 진홍의 여왕,The scarlet empress,1934

by 유감독 posted Sep 0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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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폰 스턴버그,Josef von Sternberg 감독

Marlene Dietrich ....  Princess Sophia Frederica/Catherine II
John Lodge ....  Count Alexei
Sam Jaffe ....  Grand Duke Peter
Louise Dresser ....  Empress Elizabeth Petrovna
C. Aubrey Smith ....  Prince August
Gavin Gordon ....  Capt. Gregori Orloff
Olive Tell ....  Princess Johanna Elizabeth

16:9 wide screen/color/2.1 돌비 디지틀/110분
언어/미국
자막/한국
번역/DRFA,김교수




"이번 추석!  러시아 역사상 가장 부와 공포를 가져다주었던 여자, 예카리나 여제를 만나보세요!





(Catherine II[a] (born Sophie of Anhalt-Zerbst; 2 May 1729 ~17 November 1796)




여러분은 DRFA 2주년 특집으로 상영했던

푸시킨 원작의 <템페스트> 기억 나시나요?

예카리나 여제의 수청을 거부한 주인공 사관 생도가 오지로 쫓겨나서

그곳에서 대위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죠.

그 영화에서도 모든 젊은 사관 생도들이 예카리나 여제의 수청 상대가 될까봐 공포에 떠는 장면이 나오죠.

예카테리나 대제(예카체리나 빌리카야 Екатерина Великая)는 종종

중국의 측천무후와 비교되면서 그녀가 살아 생전 품었던 남자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일단 그녀의 수청 상대로 지목되면 그 남자는 엄격한 건강 검진을 받게 된다네요.

까다로운 건강 검진을 통과하고 나면 두번째로는

그가 여제를 즐겁게 해줄만한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는지 지적 테스트를 받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과하면 그는 여제가 지목하는 수석 상궁과 먼저 시범 테스트 섹스를 해보고

충분히 괜찮다는 수석 상궁의 소견이 있을 때야 비로소

여제와 최종 합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카리나 여제는 늙어가면서 이러한 이성적 과정 또한 육체의 정욕 앞에서 몰락하고

나중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육체적으로 땡기면 무조건 관계를 갖는

섹스 중독증에 시달렸다고 하네요.

예카리나 여제의 수많은 애인 중에 유명한 이를 몇 명 꼽자면,

세르게이 살티코프 공작, 포템킨 공작, 주보프, 알렉산드르 란스코이, 그레고리 오를로프가 있습니다.

이중에서 오를로프는는 유일하게 예카리나 여제가 일생에서 딱 한 번 사랑했던 남자였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여제가 남편 표트르 3세에게 반기를 들었을 때,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까지 두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카리나 여제는 사랑보다는 조국 러시아의 번영을 선택했으며

그 어떤 남자도 예카리나의 사랑이 되지 못했습니다.

폴란드의 마지막 왕인 스타니스와프 2세도 그녀의 정부로 전락했으니

정말 그녀의 권세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군요.


만약에 그녀가 이런 색마에 불과했다면 오늘 날

러시아 국민들이 그녀를 그리워 하지 않았겠죠.

예카리나 여제는 당시 러시아의 농업과 상공업을 가장 부흥시킨 황제로

이때의 러시아의 국력은 거의 세계 최강이 됩니다.

또한 문학을 사랑하여 볼테르 등 문인들을 후원하고,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를 적극 밀어서 러시아에 수학의 초석을 놓는 업적을 이룹니다.

그녀는 예술에도 지대한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명 화가들의 그림과 고작들을 모두 사들여

그 유명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듭니다.





인생의 한 방을 알았던 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Josef von Sternberg(1894~1969)


비록 오늘날에는 마를렌 디트리히의 연인 정도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지만, 조셉 폰 스턴버그는 독창적인 조명와 세트장식 활용으로 뛰어난 스타일의 화면을 구사했던 당대의 일급감독이었다. 또한 할리우드의 초창기에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대부분의 감독이 이미 고국에서 감독으로서의 명성을 얻고 미국으로 ‘수입’된 데 반해서(가령 프리츠 랑이나 무르나우 같은) 스턴버그는 미국에서 영화를 시작한 몇 안 되는 유럽 출신감독이기도 했다. 비엔나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간 스턴버그는 1차대전 동안 미국 선전국에서 근무했으며 나중에 영화계로 자리를 옮겨 조감독을 지낸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1925년에 만든 실험적인 드라마 <구원의 사냥꾼 The Salvation Hunters>이었다. 그후로도 그는 몇편의 영화를 만들었으나 소규모 제작인 탓에 제대로 배급이 되질 않다가 최초로 스튜디오와의 계약작품인 <지하세계 Under-world>(1927)를 만든다. <지하세계>는 당시 막 발아하던 필름누아르의 시초 같은 작품이자 주연인 에밀 제닝스에게 오스카를 안겨준 성공작이었다. 이를 계기로 제닝스와 돈독한 관계를 맺게 된 스턴버그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독일에서 <푸른 천사 The Blue Angel> (1930)를 만들게 된다. 사실 <푸른 천사>는 주연인 제닝스가 돋보이도록 기획된 작품이지만 작품의 성공으로 정작 빛을 본 사람은 감독인 스턴버그와 여주인공 마를렌 디트리히였다. 독일어와 영어, 두가지 버전으로 제작된 이 영화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로 유럽과 미국의 스크린을 동시에 휘어잡았다. 물론 여기에는 그녀의 매력을 한껏 드러내기 위해 스턴버그가 발휘한 고도의 조명기술도 큰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첨예하게 음양을 대비한 흑백화면에 나타난 그녀의 ‘100만달러짜리 각선미’에 매료당한 관객들은 그녀를 ‘여신’으로 받들기 시작했다. <푸른 천사>의 대성공을 계기로 스턴버그와 디트리히는 감독-배우이자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둘이 콤비를 이루어 <모로코 Moroco> (1930) <상하이 특급 Shanghai Express> (1932) <타락한 황후 The Scarlet Empress> (1934) 같은 영화들을 발표한다. 이 영화들을 통해 감독은 여러차례 오스카 감독상에 지명되고 디트리히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등 그들은 전성기를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디트리히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스턴버그도 쇠락해 가기 시작했다. 그가 파라마운트와 컬럼비아를 거치면서 만든 <미국의 비극 An American Tradegy>(1934)과 <죄와 벌 Crime & Punishment>(1935) 같은 작품들은 예전과 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심지어 어떤 영화는 촬영을 시작하고도 완성치 못한 경우도 있었다. 사정이 예전같지 않자 스턴버그는 스튜디오와 일하는 대신 독립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상하이 제스처 Shanghai Gesture>(1941) 같은 뛰어난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말년의 그는 하워드 휴스의 지원을 받아서 몇몇 작품을 한 뒤 미국 내에서 자본조달이 어렵자 일본인 프로듀서의 지원을 받아 전원 일본배우를 캐스팅한 <아나탄의 전설 The Saga of Anatahan> (1952) 같은 영화를 만들기도 했지만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은퇴한 뒤 스턴버그는 UCLA 영화학부에서 강연을 하는 등 후학을 양성하다가 1979년 여든다섯으로 사망했다.[영화감독사전]










프로이센 출신의, 별볼일 없는 시골 귀족의 딸로 태어나

남편 표트르 3세를 쿠데타로 퇴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제위에 등극하여

34년간 권력을 휘둘다 간 여걸 예카리나 여제의 생애에  마를렌 디트리히가 도전합니다,

결과는 싱크로율 100%, 이 영화는 현재까지 IMDB 7.9를 오르락거릴 정도로

퍼펙트 스코어를 기록합니다.

할리우드의 30년대 전성기 시절에 제작된 만큼 스튜디오 시스템의 극대화를 보여줍니다.

어떻게 동원했는지 의아스러운 수많은 엑스트라의 동원,

눈이 딱 벌어질 정도의 웅장하기 그지없는 당시 러시아 궁전의 재현 등이

분명히 흑백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위력을 보여줍니다.

에이젠쉬타인의 '전함 포템킨'에서 강렬하게 돋보인 몽타쥬 기법이 여기서도 여과없이 사용됩니다.

과도하고 반복적인 편집을 통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여왕의 남편과

주변 인물들의 분위기를 표현주의 영화의 미장센으로 포장하는데 성공하죠.

교차 편집과 이중 화면 그리고 코자크 군사들의 강렬한 행진 등,

도무지 3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보기에 믿어지지 않는 웅장한 화면들의 연속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영화를 통해 왜 마를렌느 디트리히가 시대를 한참 앞서간 여배우라고 하는지

분명히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녀의 강렬한 카리스마가 예카리나 여제를 20세기에 가볍게 소환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천하의 예카리나라 할지라도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에게 딱 한 번의 사랑이 찾아오지만 그녀는 사랑 대신에

조국 러시아의 번영을 선택합니다.

이번 추석 특선으로 조나단 유가 사랑하는 100년 전의 명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와 함께 러시아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DRFA,JONAT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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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반드시 알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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