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 단 한번의 행복도 허락하지 않았던 화가!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을 발전시킨 오스트레일리아의 화가입니다.
주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루어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죽음과 소녀>는 실레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죠.
구스타프 클림트의 친구이자 피후견인이었던 에곤 쉴레는
클림트의 표현주의적인 선들을 더욱 발전시켜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룸으로써,
20세기 초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빈 공간을 배경으로 툭툭 튀어나온 뼈가 도드라져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마르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한 쉴레의 자화상은
고뇌하는 미술가 신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쉴레는 열여섯 살에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지만,
그곳의 교육이 케케묵고 인습적이라고 생각되어 곧 그만두게 됩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하게 되죠.
그 후 그는 여인들과 소녀들의 누드화를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게 묘사한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드로잉들은 쉴레가 크루마우로 이주한 후인 1911년에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모델이자 동거녀었던 발레리 '발리' 노이칠과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미성년자들을 모델로 그린 그림들 때문에
크루마우에서 추방당하게 됩니다.
노이렝바흐에서는 더욱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1912년 쉴레는 그곳에서 어린 모델들을 데려다가 부도덕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죄목으로
잠시 동안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1915년 쉴레는 발리와의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이 결혼은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쉴레는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어서 아내인 에디트가 임신까지 하게 되고
실레는 빈 분리파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해에 사망한 클림트의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경제적으로도 풍족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아버지가 된다는 기대감으로 <가족,1918>을 완성하게 되죠.
인생은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에서 묘사하시 시작할 즈음에
같은 해 10월, 쉴레의 아내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게 됩니다.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잃고 슬퍼하던 쉴레 역시도
스페인 독감으로 3일 뒤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모딜리아니와 함께 살면서 단 한 번의 행복조차 신으로부터 허락받지 못했던 비운의 화가
에곤 쉴레의 삶을 만나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DRFA 우수회원을 위한 영화로
10PLUS1 회원을 가시셨다 할지라도
윤실장에게 문자로 참여 여부에 관한 허락을 받으셔야 합니다.
딱 한 번 상영하는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DRFA,JONAT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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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Q(3)
은평구연천중(7/R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