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가의 삶/문학의 향기 속으로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1986

by 애니 posted Jun 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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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끄 아노,Jean Jacques Annaud 감독

Sean Connery...William of Baskerville
F. Murray Abraham...Bernardo Gui
Christian Slater...Adso of Melk
Elya Baskin...Severinus
Michael Lonsdale...The Abbot
Volker Prechtel...Malachia
Feodor Chaliapin Jr....Jorge de Burgos

1.33:1 standard screen/color/2.1 스테레오/130분
"1988' BAFTA Awards 남우주연상, 의상상
1987' Bavarian Film Awards 미술상
1987' César Awards, France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1987' David di Donatello Awards 촬영상,미술상,의상상,특별감독상
1987' German Film Awards 남우주연상
1986' Golden Screen, Germany 그랑프리
1987' Italian National Syndicate of Film Journalists 촬영상,미술상
1986' Jupiter Award 미술상
1987' Turkish Film Critics Association (SIYAD) Awards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언어/France+Italy+West Germany
자막/한국
번역감수/DRFA,김교수




"지적이고 싸느란 움베르트 에코의 문학 속으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1932~2016)




기호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역사학자, 미학자로 활동했던

볼로냐 대학교의 교수였던 움베르토 에코가 딱 한 번 미스테리 소설에 도전한 것이

장미의 이름이죠,

움베르토는 변호사가 되길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세 철학과 문학으로 전공을 선회,

1954년 토마스 아퀴나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게 됩니다.

1962년 토리노 대학교와 밀라노 대학교에서 미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최초의 주요 저서인 <열린 작품,Opera apertas,1962>을 발간해

현대미학의 새로운 해석방법을 제시하게 되죠.


그래서인지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움베르토 에코에 빠지지 않는 게 이상하겠죠?

<연인>으로 색채 미학의 극한까지 다가가 보았던 장 자크가 이번에는

움베르토 에코의 무시무시한 중세 기호학 소설을 스크린에 옮기고 싶은 욕망은

지극히 당연해 보입니다.


1327년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벽화를 그리는 수사 아델모가 죽은 채로 발견됩니다.

아델모의 죽음이 당시 교회의 청빈을 주장하는 프라시스코 수도회와

그를 반박하는 교황청 사이에서 일어난 음모론이라고 믿던 수사들은

각파에서 공정하게 수사관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죠.

그래서 프란시스코 수도회에서는 숀 코넬리가 연기하는 윌리엄 수사가 선출되어

수도원에 도착합니다.

윌리엄 수사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이번에는

희랍어를 번역하는 수사가 다시 살해됩니다.

범인은 마치 계시록의 일곱 재앙을 연상케 하는 수법으로

희생자들을 살해했기 때문에

수도원에는 급기야 요한 계시록의 종말론이 임했다는 소문이 나돕니다.

범인을 추적하던 윌리엄은 이 연쇄 살인은

계속해서 수많은 고문서가 저장되어 있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제자 와 함께 조금씩 수도원의 가장 깊은 비밀 속으로 다가갑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1967년 <시각커뮤니케이션 기호학을 위한 노트>를 출간했는데

인간의 사고와 문화행위, 이념구성 등에 다양하게 관련되어 있는 기호를

개념, 유형, 의미론, 이데올로기 등으로 명쾌하게 분석 정리해 놓았죠.

그래서 그의 베스트셀러 <장미의 이름> 속에는

문화, 즉 읽는 문화가 아니라 보는 문화의 전형적인 사례인

중세 미학과 러시아 형식주의,

그리고 아방가르드 문화가 독특하게 충돌하면서

기존 예술영화들과는 완연히 다른 미학관을 보여주고 있죠.

일단 영화가 너무나 멋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중세 수도원에서 튀어나온 듯한 숀 코넬리의

회색빛 수도복과, 숨막히듯이 범인의 실체에 다다갈수록

영험하게 펼쳐지는 수도원의 거대한 미장센이

보는 것만으로도 지적 호기심을 만땅으로 채워주죠.

그래서 35년이 지난 이 영화를 다시 한 번만 대형화면에서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죠.


움베르토 에코는 문학은 죽는 방법까지 가르쳐 준다고 말할 정도로

문학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 학자입니다.

이 영화는 그런 에코의 문학에 대한 비장한 집착이 가장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르크스, 단테, 네르발, 와일드, 조이스, 보르헤스 등의 수많은 문학에 등장하는

비평과 문체, 상징, 형식, 아이러니 등을

절묘하게 <장미의 이름> 속에 녹여내고 있습니다.

아래에는 이 영화를 보고 장장 몇 달에 걸쳐 분석한 어느 비전문 비평가의 분석글입니다.

영화 보기전 한 번 쭈욱 읽어보시면

<장미의 이름>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올 것 같네요,

어떤가요?

장맛비가 예고된 눅눅한 동검도 섬의 한 자락에서

중세 깊은 수도원에서 펼쳐지는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유희에

나의 두뇌를 한 번 맡겨보는 것은요?



[DRFA,JONATHAN]











움베르트 에코의 소설을 영상으로 펼쳐놓은 영화 '장미의 이름'을 보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의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다양한 접근을 철학적으로 시도하고자 한다. 여기서 시도할 철학적 접근은 '[1.이 영화에서 두드러진 보편 논쟁.] [2.호르헤 신부의 행동에 한 니체적 접근.] [3.영화의 내용에 대한 맑스적 접근.] [4.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의 행동을 제약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라캉-알튀세르적 접근.]'의 순서로 이루어질 것이다. 쓰는 이의 배경 지식이 부족한 관계로 그리 깊은 논의는 전개되지는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미리 해둔다.

1.보편 논쟁에 관하여

  영화의 내용에서 보면 가장 주된 대립의 축은 기존 성직자를 대변하는 호르헤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베네딕트파와 교회 내부의 개혁 세력을 대표하는 윌리암 신부를 중심으로 하는 후란씨스코파의 대립이다. 이들 사이의 대립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사용하는 대립 대신에 철학적.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전개된다. 이것의 논쟁의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희극론이 끼어들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내용이다.

  베네딕트파에서 말하고 있는 단면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난다. 식사 때 한 수도사가 '묻기 전에는 대답하면 안 된다. 웃어서는 안 된다. 품위를 떨어뜨리면 안 된다.'라는 말을 한 것. 또 호르헤 신부가 윌리암 신부와의 논쟁에서 '웃음을 두려움을 없애며 이것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까지 없애는데 이것 없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진다'고 말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장면 등등. 반면에 후란씨스코파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신앙에서 이성을 강조하며 웃음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대립의 양상은 다만 철학적 논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철학적 논쟁에서의 후란씨스코파가 승리한다는 것은 기존의 교회 권위가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베네딕트파는 끝까지 이 논쟁에서 양보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즉 기존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며 성직자의 청렴을 주장하는 후란씨스코파의 주장은 그것이 현실적이든 철학적이든 기존의 모든 교회 권력을 쥐고 이득을 보고 있는 주류 세력인 베네딕트파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후란씨스코파의 단기적 기간의 관점에서 패배를 어느 정도 예상하게 해 준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역사의 수레 바퀴가 정방향으로 나아간다면 후란씨스코파의 승리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대립은 실제 역사상에서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보편 논쟁이다. 실재론과 유명론의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세 초반의 교회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였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의 자리에 신을 갖다 놓은 것인데, 이것은 신이라는 보편이 존재하며 개별자들은 모두 이 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실재론적 주장이었다. "universaliis ante res" 즉 보편이 앞선다라는 주장으로 요약되는 실재론자들의 입장은 교회의 주류 세력으로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아 나타난 중세 주류 철학을 해체하는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입장이 바로 유명론이다. 유명론은 "universalis post res" 즉 보편이 뒤따른다라고하여 잘못하면 신의 개념을 붕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주장을 하게 된다. 보편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다만 이름뿐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진다면 신이라는 것도 개념에 불과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이러한 주장은 로스켈리우스와 아벨라르두스를 거쳐 윌리암 오컴에까지 이어져 중세 주류 철학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가했다. 이 영화에서 후란씨스코파의 윌리암 신부의 이름이 '윌리암 오컴'이라는 유명론자의 이름과 같은 것도 우연이 아닌 듯.

  결국 역사에서도 아퀴나스가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실재론적 입장이 중세 기간 동안에는 유지되었고, 중세가 끝나면서 유명론의 입장이 경험주의로 나아간다는 것은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일종의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결국 유명론이 승리한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가 넓혀지는 방향으로 역사가 진행한다는 암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니체적 접근

  니체라는 사람은 근대 철학을 해체하는 데 일조한 사람이다.

  중세가 끝난 이후에 근대로 접어들면서 철학의 내용을 가득 채운 것은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시작된 것이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제 근대에서는 이성을 가진 인간 주체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주체가 과연 중세에는 신의 이름으로 보장되었던 진리라는 것을 터득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 중심 과제로 떠올랐다. 데카르트에서 시작하여 로크, 버클리, 흄, 칸트, 피히테, 헤겔 등이 다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파고 들어갔던 것이다.

  니체는 여기서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벗어난다. 그는 다른 근대 철학자들처럼 진리를 찾고 그것의 확실함을 보장하는 길을 가는 대신 왜 진리를 찾으려고 하는가하는 진리 의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 있다."라는 말이 그의 문제 의식을 잘 정리하는 말인 듯.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라는 환상에 대한 유혹이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진리에 다른 거짓된 지식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지로의 유혹이며, 또한 거짓으로부터 사수되어야 한다는 착각으로의 유혹이며, 이걸 사수하기 위해선 다른 거짓을 전파하는 자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의 유혹이라는 것이다.

  호르헤 신부는 니체의 이런 문제 의식에 너무나 잘 부합하는 대상이다. 그는 희극이라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이런 거짓된 지식에 대해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지켜야 한다는 진리 의지를 강하게 지녔던 인물이다. 그는 이 진리 의지를 가지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거짓 지식을 익히려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나중에는 자신의 진리가 무너지려고 하자 진리를 왜곡시킬 수 있는 문제의 희극론 책과 함께 자신을 불살라 버린다. 무서운 진리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3.맑스적 접근

  이 영화를 맑스적으로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맑스주의가 항상 피억압 기층 민중과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은 돌치노파에 주목하고 싶다.

  이 영화에서 베네딕트파는 물론이고 후란씨스코파조차도 중세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은 성직자들의 청렴은 강조하여 중세 교회의 개혁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주기는 하지만 세속에 대한 개입은 시도하지 않고 있다. 봉건 영주에 의해 착취받고 있었던 농민들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후에 돌치노파 수도승이 종교 재판을 받을 때 윌리암 신부가 그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했던 것은 그들이 중세의 한계 속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들의 당시 상황에 대한 고려는 있어야 하겠다.)

  반면 돌치노파의 수도승들은 스스로 부자들의 적임을 자칭하며 종교라는 것을 통해 일종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만약 이들의 주장대로 된다면 후란씨스코파의 영향보다도 더 큰 파장을 일으켜 중세 사회의 붕괴가 필연적이게 될 것이다. 이에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의 권위는 후란씨스코파보다는 돌치노파를 제 1차 제거 대상으로 삼고 이에 대한 종교적 숙청을 감행하려 한 것이다.

  돌치노파에 대하여 감독이 제시하고 있는 것 중 다음 두 가지가 인상에 남는다.

  첫째는 돌치노파 수도승이 화형 당하고 있을 때 화재가 발생하자 농민들이 돌을 들어 군인들에 대항해 그 수도승을 구하는 장면이다. 현대를 사는 지금 후란씨스코파의 주장들은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돌치노파의 주장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피억압 계층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중세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이 장면을 보고 노동자와 지식인 사이의 연대와 투쟁 가능성을 본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둘째는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암의 제자였던 앗소의 독백이 기억에 남는다. 앗소의 입을 빌어 감독은 스승이 너무 이론적인 것에만 머물렀다고 하며 비판한다. 물론 그 비판이 너무나 짧아서 인위적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감독의 의도도 돌치노파에로의 접근이 아니었을까 한다.

하여간 맑스주의자가 영화를 만들었다면 돌치노파에 대한 강조가 더해졌을 것이다.

4.라캉-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통한 접근(구조주의적 접근)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이데올로기론에는 나중에 둘 사이의 철학적 결별이 있듯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여기에서는 공통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본 후에 라캉식의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알튀세르적인 해석을 통해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의 행동의 차이를 유발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 둘 사이의 공통점은 둘 다 그들의 행동을 추동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호르헤 신부는 왜 죽음을 택했는가? 윌리암 신부는 왜 떠돌이 생활을 택하게 되었는가? 물론 앞에서와 같이 니체식으로 진리의지로 파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왜 그 진리 의지는 생기게 되었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론을 도입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그 두 사람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런 행동을 자신의 참모습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라캉의 이론을 이데올로기론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깊은 연관은 있는 것 같다. 라캉은 언어를 통하여 주체의 형성 및 무의식,욕망의 형성을 설명하였다. 아마도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는 자신의 행동을 하면서 그것이 확고한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진리를 지키려는 또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는 그런 행동을 확고한 자신의 모습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과감한 행동이 생겨나기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캉은 이 상황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타자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라고. 즉 그들의 행동은 확고한 그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것에 의하여 구조화되어 있는 주체를 통하여 오인/승인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행동한 것이 아니라 타자라는 것이 그들을 통해 행동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은 구조에 의한 희생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캉식의 해석에 약간의 난점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타자라는 것을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기표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과연 언어가 이런 구조화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라는 단일한 타자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주체(행동)이 나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빌어와야 할 것 같다. 알튀세르는 타자로서 라캉의 언어 대신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두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호르헤 신부와 윌리암 신부의 대립이 단순히 언어에 의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교회 권력이라는 국가 장치에 대한 문제가 오히려 더 본질적으로 깔려 있다. 따라서 타자는 보다 유물론적으로 해석해야 두 신부의 행동의 절실함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라캉은 타자를 하나로 지정할 뿐만 아니라 주체화 과정인 호명도 단일한 과정으로 설명하였는데 이걸 가지고서는 두 신부 사이에 발생하는 행동과 관점의 차이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빌어온다면 이 문제에 대한 어느 정도의 해명이 가능할 것 같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단일한 주체가 생성된다는 생각을 거부하였다. 그는 다음 두 가지 상황을 제시했다. 하나는 이데올로기 내부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고, 복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불려진 복수의 주체 사이에서 갈등이 있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이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두 신부 사이의 차이는 규명될 수 있다. 두 신부는 갈등적 이데올로기와 호명된 주체 사이에서 어떤 주체를 선택할까 하는 자유를 가지게 되고 그 속에서 하나의 주체를 택하여 그것을 확고한 주체로 설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특히 윌리암 신부의 선택을 보면 이는 더욱 확고하게 드러난다. 윌리암 신부는 원래 이단 심문관으로서 몇 가지 가능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교회의 종파로 도식화한다면 베네딕트파, 후란씨스코파, 돌치노파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는 다수의 갈등적 이데올로기와 주체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하고 죽을 때까지(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호르헤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주체를 확고하다고 믿고 행동하며 살았다.

  이상 '장미의 이름'을 다양한 철학적 입장을 통해 접근해 보았다. 이런 다양한 접근이 이 영화의 이해를 폭넓게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글을 쓰면서 각 철학자들의 입장을 왜곡시키지 않았나 하는 걱정을 남겨둔 채 글을 마친다.[DRF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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