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사람들

파스칼,Blaise Pascal,1972

by 유감독 posted Jun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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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감독

Pierre Arditi  ...  Blaise Pascal  
  Rita Forzano  ...  Jacqueline Pascal  
  Giuseppe Addobbati  ...  Étienne Pascal  
  Christian De Sica  ...  Luogotenente criminale  

1.33 : 1 screen/Color (Eastmancolor)/2.0 모노/90분
언어/Italy+France
자막/한국
번역/DRFA,조학제



"잉그리드 버그만이 빠졌던 남자, 로셀리니가 도전하는 파스칼의 생애"





(Blaise Pascal,19 June 1623~19 August 1662)


"우주는 미세한 창조주의 수학적 공법에 의해 정교하게 움직인다"


모든 철학과 물리학의 끝은 창조주 하나님이죠.

아직 그걸 깨닫지 못한 철학자와 물리학자는 갈 길이 멀었음을 최초로 시사했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물리학자입니다.

12세 때 유클리드 기하학에 몰두하여

16세에는 데자르그(Desargues)의 사영기하학(射影幾何學)을 근거로 하여

<원추곡선론,Essai pour les coniques>을 주창,

1642년 인류 최초로 오늘 날의 전자계산기의 원형이 되는

계산기를 만들어냅니다,

1646년에는 토리첼리의 기압계 실험을 배움으로써

진공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주장하였는데,

그의 진공 및 공기 압력에 관한 이론은

자연에 관한 역학이론을 발전시키고

자연의 신비성을 제거하는 데 큰 몫을 합니다.

초기에는 자유사상가들과 어울렸으나

종교적 체험 이후 포르 르와얄 수도원에 들어가 종교에 귀의합니다.

삶의 허무를 강조하는 회의주의나 쾌락주의를 주장한 스토아 학파의 모순을 지적하며

인간은 궁극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깨달았을 때에만

구원이 가능함을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종교적 입장은 <팡세,Pensée>에 잘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의 그의 기독교적 변증론은 모든 신학 서적을 능가하고 있죠.

이러한 파스칼의 신앙적 태도는 오늘 날 흔히

키에르케고르와 비교되기도 하며

특히 실존주의자들의 탐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파스칼은 인간의 삶의 조건,

즉 한계 상황을 명백히 제시하기 때문이죠.

수학과 자연 과학이 인류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역시 한계가 있으며 결국 인간이 진리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후대의 평론가들을 결국 그를

신비주의적 철학에 가득 찬 수학자라고 평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그의 이러한 삶을 이번에 조학제 제독님이 번역한

<로셀리니의 파스칼>로 진지하게 만나보겠습니다.









시대를 흔들었던 위대한 여자가 어떤 남자에게 빠져들어갈 때는

그 어떤 연유로 빠져들게 되는 것일까요?

1948년 뉴욕의 맨해튼.

잉그리드 버그만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파이잔>을 보기 위해 텅 빈 극장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이미 2년 전 로셀리니의 네오리얼리즘의 걸작 <무방비 도시>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로셀리니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다 찾아보았죠.

<무방비 도시>의 단순하고도 강렬한 리얼리즘 색채에 매료된 버그만은

<파이잔>을 본 후, 로셀리니에게 편지를 썼죠.


“만약 당신이 영어를 매우 잘하는,

이탈리아어는 그저 ‘사랑해 ti amo’ 밖에 모르는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든 그곳으로 가서 당신과 영화를 찍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로셀리니는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버그만의 명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버그만은 <가스등>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알프레드 히치콕의 <스펠바운드>와 <오명>, 레오 맥커리의 <성 메리의 종>,

빅터 플레밍의 <잔다르크> 등에 출연하며 할리우드 여신으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때죠. 

동료들은 로셀리니에게 버그만의 명성에 대해 넌지시 일러주었지만

그는 할리우드 대스타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로셀리니는 버그만이 자신의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의지를 영화에 대한

재정적 투자의 의미로 받아들였죠.

결국 버그만이 로셀리니의 신작에 출연하기로 하자

전설적인 미디어 재벌인 하워드 휴즈가 제작자로 나섰습니다.

휴즈는 에바 가드너를 비롯한 여러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버그만에게도 반한 상태였죠.

이 위험한 사랑은 처음부터 폭탄을 안고 시작되었죠.

특히 버그만이 빼앗은 로셀리니는 유럽 영화계의 대선배 Anna Magnani 이죠.

자신 역시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서 버그만은

왜 그다지도 무모한 사랑을 시작하였을까요?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버그만은 함께 한 첫 영화 <스트롬볼리>를 촬영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아이를 가졌다)




두 사람이 함께한 첫 영화 <스트롬볼리>를 촬영하는 동안

두 사람은 이미 아이를 가지게 됩니다.

엄격한 청교도적 윤리가 팽배했던 미국에서는 맹비난이 쏟아졌죠.

국회의원과 종교 지도자, 시민 단체를 비롯한

전 미국 사회가 들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스트롬볼리>는 유럽에서 대성공을 거둬드립니다.

<스트롬볼리>의 비관습적이고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는

버그만 팬들의 기호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지만

결국 버그만이 그토록 헐리우드 영화에서 찾지 못했던

여배우로서의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데는

결정적인 필모가 되고 맙니다.

로셀리니는 자신의 아내이자 영감의 원천인 버그만을 데리고

<유로파 51>, <이탈리아 여행>, <공포> 등의 영화를 차례로 완성해갔지만

수많은 영화 동지들로부터 네오 리얼리즘을 차디차게 배반한

배반자로 낙인 찍혔습니다.

잇따른 상업적 실패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은 버그만을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버그만은 로셀리니를 떠나

1956년 장 르누아르의 <엘레나와 남자들>을 찍은 후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갑니다.

로셀리니의 예술적 단물을 제대로 흡수한 버그만은

헐리우드 복귀작 <추상>에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무서운 성숙의 연기를 보여줌으로서 단번에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꿰어 찹니다.  









한편, 버그만과 헤어진 후 훌쩍 인도로 여행을 떠났던 로셀리니는

이후 험난한 영화인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무도 자신의 영화에 투자를 해주질 않자

"다시 처음부터" 라는 결단을 내어걸고

이상하리 만큼 자신보다 앞서간 시대의 명인들을 소박하게 조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탄생한 영화들이 바로 <파스칼>과 <소크라테스>, <갈릴레오> 등의

걸작 들입니다.

대륙을 횡단한 이 세기의 연인들은 이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지만

서로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을 잊지 않았습니다.

버그만은 노년에 잉마르 베르히만의 <가을 소나타>에 출연한 뒤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죠.


“<무방비 도시>를 본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로셀리니와 사랑에 빠졌다.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면 결코 난 헐리우드의 그저 그런 여배우로 머물었을 것이다.

로셀리니는 내 일과 인생,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


잉그리드 버그만을 떠나보낸 후

홀로 쓸쓸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만들었던 심기일전의 영화,

<파스칼>을 조학제 제독님의 번역으로

만나보겠습니다.



[DRFA,JONAT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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